새로운 시작을 위한 반성, 벤처는 도전이 아닌 욕심이었다.

벤처라는 이름의 패착

만용이라 적혀 있던 것을 도전이라 읽은 어리석음

어른들의 충고를 무시했던 오만함

30여년 간 갈고닦은 내 자신의 객관과 직감에 대한 배신

욕심에 눈이 먼 폭주

인정으로 공정을 눈감은 안일함


실패를 타인에게 시인하는 것은 용기이지만,

다수를 향해 SNS에 감정을 하소연하는 것은 

길바닥에 똥덩어리를 싸지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요즘에는 타인과의 소통 이외에는 

SNS를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때로는 각오를 다지기 위해

똑간은 과오를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 치부와 부끄러움을 고백해야 할 때도 있다.


벤처에서의 생활을 중단하고 나온지 8개월을 채워간다.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후회를 가슴에 새겼고

유래없이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내 가족의 생활까지 위기에 몰아넣은

그 생활을 마감하면,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어도

적어도 악화되던 모든 것들이 중단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인생 그렇게 호락호락 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아직도 억울하다고 하소연하고 싶고

저놈이 나빴다고 그놈이 잘못했다고 

욕도 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 전에 사실 다 내 잘못이었음을 

먼저 시인해야 한다.


30년간의 내 삶에는 원칙이 있었다.

첫째, 도전에 경제적 리스크를 동반하지 않을 것...

적자를 볼 수는 있지만

적자가 삶을 위협하지 않는 수준으로 제한했었다.

둘째, 타인에게 의지하지 말 것...

가족이나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는 있다.

단, 그들의 삶에 피해를 주지 않아야 했다.

셋째, 직감을 신뢰할 것...

인간의 무의식은 이성과는 비교가 안되게 똑똑하다.

다만, 똑똑해지려면 많은 경험과 학습이 필요하다.

나는 내 자신의 직감을 전적으로 신뢰 할만큼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내 직감을 신뢰하고

직감은 나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넷째, 다수의 의견을 경청할 것...

최소 셋 이상이 같은 목소리를 낸다면,

아무리 듣기 싫은 말도 신뢰해야 한다.

다섯째, 경험을 우대할 것...

내게 있어서 경험은 논리에 앞선다.

대부분의 논리는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이고

사람은 논리적으로 행동하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벤처라는 무모함에 있어서

앞의 중요한 다섯까지 원칙 중 단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첫째, 어마어마한 수준의 연봉하락을 허락했다.

아울러 복지와 안정까지 합산하면 연간 억대 수준이었다.

둘째, 어머니의 노후자금을 끌어들였다.

평생을 두고 반성해야 할 일이다.

셋째, 직감이 주는 경고를 

벤처에서 얻을 수익에 대한 기대로 덮어버렸다.

전형적으로 돈에 눈이 먼 얼간이 짓이다.

넷째, 주위 어른들의 만류에 귀를 막았다.

다들 내가 존경하고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하신 분들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들이 21세기 벤처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다는 오만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분들은 벤처 이전에 나보다 인간을 더 잘 이해하고 계셨다.

다섯째, 위의 충고를 하신 분 중에는

삼성에서 부장까지 지내신 후

퇴직하시고 창업을 하신 사촌형님도 계셨다.

나는 그 분의 직장인이었다는 과정을 무시하고

창업 후 수백명의 직원을 거느린 성공만 보았다.

경험을 무시하고 결과만 존경했다.


그리고 결과는 처참했음을 고백한다.

2012년 벤처에서 받은 쥐꼬리만한 수입의 25%는 병원비로 지출했고,

아직도 대학병원에서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는다.

어머니의 노후자금도 온전히 보전하지 못했으며,

그마저도 아직 돌려드릴 형편도 되지 않는다.

내 개인자산은 대폭 하락했고 현금 유동성은 0에 수렴한다.

돈이 없어 집안 기자재 팔아치우는 건

70~80년대 드라마나 소설에나 나오는 건 줄 알았는데

내가 벤처를 다니며 했던 짓이다.


내가 벤처에서 기대한 것은

도전과 모험과 존중과 이해와 협력이었다.

그러나 신기술 도입에 격렬한 반대와 싸워야 했고,

개발자의 호소는 무시당하기 일쑤고,

영업에게 부응하지 못한다며 비교와 폄하당하고,

디자이너가 부응하지 못한 책임도 개발자가 떠안아야 했다.

항상 술먹고 비웃던 우리나라 IT업계의 부조리가

그곳에서 나에게 그대로 쏟아지고 있었다.

혹자 내게 말했다.

그래서 벤처에서 네 맘대로 못한게 뭐가 있냐고...

유감스럽게도 삼성에서도 그 정도는 얼마든지 내 마음대로 했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내 마음대로 하는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다함께 하는 거였다.

실리콘벨리의 문화를 따라잡고 

한국 기업문화를 뛰어 넘는 것이었다.

그 회사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거다.

전에 산업기능요원으로 다니던 회사들과 똑같이...


인생은 아이러니 하다.


LG전자에 입사한건 지인의 도움이 매우 컸다.

그는 매우 열정적이고 도전적이지만 

조직에서 부드러움이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실리콘벨리 문화를 향해 

동료들과 함께 빠르게 전진하고 있었다.

방해와 타협할 시간 없이 뚫고 전진해 나갔다.

그런 그의 추천이었기에 

스펙상 부족한 내가 연구소에 이직할 수 있었다.

내가 벤처에서 기대했던 것들이 지금 현재 그곳에 있다.

동료들은 모두 친구처럼 다정하고 스스럼 없고 유쾌하지만,

나이를 떠나 존대말을 쓰며 서로 존중하고 배려한다.

각자가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도입하는데 매우 적극적이며

타인의 노력을 나누고 기꺼이 동참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수년간 얻고자 했던 것을 몇 개월만에 다함께 얻을 수 있었다.


절망으로 떨어지기 직전 행운이 왔다고 할까?

삼성에 없었기에 벤처에서 꿈꾸었던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LG 안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LG가 삼성보다 좋다기 보다는 

사업부와 연구소의 차이가 크다고 생각한다.)


생활은 안정되기 시작했고

건강이 더이상 악화되는 것도 멈추었으며

재무 시스템도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다시 준비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고 있다.


아마 이 어마어마한 경제적 실패는

LG의 연봉과 복지만으로는 절대 복구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분간 안정적인 인생, 시간적인 여유,

프로그래머로써 발전하는 기회는 보장 받았다.

좋은 동료들도 얻었다.

도전할 목표들도 생겼다.


삼성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앞의 다섯 가지 원칙이 

더 큰 성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했었다.

더 큰 리스크를 통해 더 큰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내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나는 틀리지 않았다.


타인을 신뢰하기에 앞서 

내 자신을 신뢰해야 한다는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그래서 오늘 고백할 수 있다.

내게 있어 벤처라는 것은

열정적인 도전이 아니라

욕심에 눈이 먼 도박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다짐한다.

이제 앞으로 무엇을 하던지 

나는 내 인생의 원칙을 소중히 할 것임을...


마지막으로 내 소중한 사람들이 벤처에 도전하겠다고 한다면,

단 한가지만 명심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사람을 보라."

모든 성공과 실패의 핵심은 사람이 쥐고 있다.

절친한 친구라고 해서

좋은 사업 파트너나 보스 또는 직원이 될 수 없다.

그 사람이 그 장소와 역할에 맡는 사람인지 보라.

친하고 안친한 것은 절대 중요하게 고려하면 안되는 사항이다.


오늘 이 글을 통해 실패에 대한 공개적인 시인과 반성을 함으로써

모든 원망과 부끄러움을 털어버리려 한다.

이미 내게는 새로운 도전들이 시작되어 있기 때문에...